아들 원길(元吉)의 추은(推恩)으로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광록대부 옥천부원군(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輔國光祿大夫玉川府院君)에 추증(追贈)되셨다. 삼가 『순창군지』를 조사하여 보면 문과(文科)에 급제하셨다고 하였으며 『옥천사마안(玉川司馬案』에는 생원(生員)으로 문과 급제자(及第者) 명단에 기록하면서 벼슬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벼슬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구보(舊譜)에도 문과(文科)에 합격하신 기록을 빠뜨려 허술하게 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군지(郡誌)와 사마안(司馬案)을 따르기로 한다.配馬韓國夫人(마한국부인) 潭陽田氏(담양전씨) 이 밖에 자세한 사적은 전해지지 않으며 역시 단비(壇碑)가 있다.!2子 璵(여) 금자광록대부 태사 특진상주국 검교문하시중 동평장사(金紫光祿大夫太師特進上柱國檢校門下侍中同平章事)를 지내셨다. 공께서 일찍이 태자(太子)의 스승을 지내셨는데 왕위에 올라 예(禮)를 행할 일이 있어서 묻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공을 불러 물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공의 경학(經學)과 아름다운 덕(德)은 세상의 모범이 된다고 하였다.삼가 구보(舊譜)를 조사해 보면 충정왕(忠定王) 辛卯(一三五一)에 서연(書筵)을 베풀고 공을 집의(執義)로 삼아 박충좌(朴忠佐) 이제현(李齊賢) 윤탐(尹耽) 나영걸(羅英傑) 조문근(趙文瑾) 정천유(鄭天濡) 홍준(洪俊) 등 여러 현인(賢人)들이 날마다 바꾸어가면서 왕을 모시고 학문을 토론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내용이 구보(舊譜)에는 공의 손자 판서공(判書公) 연(淵)의 방주(傍註)에 실려 있으나 시대를 참고하여 보니 이는 반드시 태사공의 사적을 잘못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옮겨 싣는다. 홍무(洪武) 庚申(一三八0)卒 墓합영단(合塋壇)配정경부인(貞敬夫人) 혹은 군부인(郡夫人) 靈光金氏(영광김씨) 庚辰(一四00)卒 墓순창군(淳昌郡) 남시랑동(南侍郞洞) 유좌(酉坐)로 기록되어 있으나 오랜 세월을 겪고 또 그동안 병란(兵亂)이 많아 증거할 만한 사적이 열에 하나도 남지 않아 묘소 역시 실전(失傳)되고 말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임실군(任實郡) 임실읍(任實邑) 갈마리 유좌(酉坐)에 단(壇)을 모아 매년 10월 초4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